4) 인적 연망을 보여주는 자료들 ?

그는 1514년(중종 9) 鳳凰坮를 건립하고 龜山에 은거하였는데, 己卯士禍 후 피신 중이던 金湜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김식이 거창 白巖에서 자결한 후 그 행장 속에서 疏草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것으로 전한다. 그는 成宗 4년(98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門下侍中이 이르러 八溪君에 봉작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러시아, 중국에서 만든 배포툴들이 이 배포파일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으며, 여러분들도 필요하다면 만드실수 있습니다. Office LTSC 2021은 엔터프라이즈 관리자가 해당 조직의 사용자에게 다운로드하여 배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소장 자료가 있으나 열람할 수 없었고, 성공회는 진천교회에서만 사진 52장을 조사하였다. 1. 거래ㆍ계약 관련 문서 거래ㆍ계약 관련 문서는 전체 142건으로 변씨 가의 소장 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2007년에는 부산시민도서관 소장 식민지 시기 부산일보와 조선시보도 디지털 이미지로 수집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洞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기가 내려오면서 면천한씨와의 결속력은 약해지고 안동권씨와 성주이씨 양 가문의 결속력이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까지 居昌鄕案에 꾸준히 입록되어 거창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5년의 『萬國史記』 13책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사 교재로 당시의 달라진 역사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광무개혁 이전의 교재는 모두 4종이다. 『朝鮮史』는 1892년 東京 吉川半七藏版에서 발간한 조선사 제1권이다. 광주오피 그 손자인 乙明 때부터는 묘가 陜川 冶爐에 있어서 선초에 이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山圖를 보면 박씨 가와 변씨 가의 분산은 산등성이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분쟁의 발생 지점은 박씨 가의 묘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미리 置標를 해 둔 곳으로 이 사건에 앞서 강씨가 묘를 썼다가 移掘당한 곳으로 나타난다. 1831)이 담당하였으며, 문집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안동의 柳致明(1777∼1861)을 비롯한 全州柳氏 一族과 河回의 柳成龍 후손인 柳尋春(1762∼1834) 등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6)과 함께 金沔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많은 軍糧을 제공하여 제용감첨정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1743)이 宋時烈과 宋浚吉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이 주목된다. 1528)은 합천 야로에서 출생하였으나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東萊鄭氏의 친정이 있는 居昌 茅谷里에서 성장하였고, 그 후손도 이 곳에 세거하였다. 1617)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다시 屛山里로 이주하였다. 규정집으로 분류한 서책은 총 14책이다. 1932년 『入學志願者心得』은 수업연한, 모집인원, 지원자격, 지원절차, 수험생주의사항, 학자금안내 등을 안내한 책자이고, 같은 해 「扶餘公立農業實修學校學則」 및 1933년 『裡里公立農林學校入學案內』와 『生徒募集』 또한 해당 학교의 학과과정․

甲戌(1754년) 洞案에는 李天命 외 37명의 명단이 입록되어 있으며 후에 追入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1430)은 李穡ㆍ權近의 문인으로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 직후 예문관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후기 향교 운영의 기반이 되었던 노비가 대폭 감소하는 것은 신분제 완화 및 해체와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918년 『金基契 日記』는 善隣商業學校 재학 때의 일기에 이어서 長端金融組合에서 서기로 재직할 때부터 대전금융조합 때까지의 일들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자료이다.일제강점기 실업계 학교생활과 그 뒤를 이은 직장생활까지를 확인할 수 있다. 변중량은 밀양 출신이지만 부친 옥란 때부터 상경 종사하여 그 아들인 吉祥(일명 彦祥)까지 3대의 묘는 황해도 長湍에 전하고 있다. 규정에 따르면, 향교재산은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받아 부윤 혹은 군수가 관리하도록 하였다(제1조), 또한 일단은 방매, 양도, 전당, 교환, 또는 소비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변중량(1345∼1398)은 鄭夢周의 문인으로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여 密直司ㆍ左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개국후 原從功臣에 녹명되기도 하였다. 칠원향교의 경우 帖文ㆍ稟目 등의 자료를 통해 보면 1908년부터 군수로부터 향교 재산을 재산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향교는 1899년(광무 3년) 중학교관제의 시행에 따라 지방에 중학교를 설치할 경우 향교를 그 校舍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으로 신교육제도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향교 재산의 관리 또한 충실하지 못하고 이를 틈탄 개인의 부정도 가세하여 날로 산실(散失)되었는데, 이를 이유로 학전을 국가가 접수하는 조치가 시행됨으로써 향교의 재산은 겨우 춘추석전을 봉행할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열악한 향교의 교육환경으로 말미암아 지방관의 관할하에 興學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는 상대적으로 향교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경주최씨 종가의 문서는 종손들이 대대로 보관해오던 것들이고, 용산서원 문서는 서원 운영의 과정에서 기록되어 남겨진 것들이다. 칠원향교 문서에는 이러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자료가 관통하고 있는 최근 100년의 역사는 비단 김해지역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良港의 조건은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해 군항으로 개발되기에 이르렀고, 해방을 맞아서는 대한민국 해군의 중심기지로 발전해 온 독특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본 완문은 신안영당에서 결정한 내용을 관에 아뢰어 이를 확인받고 있는 내용이다. 본 조사는 충북지역 근대종교, 즉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구세군, 천도교 등의 자료를 조사하며, 자료 생산시기는 전파 초기부터 1970년대 이전으로 하며, 자료 대상물은 책자, 문서, 사진으로 한정한다. 2011년도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일환으로 교육 자료조사가 있었으나, 근현대 자료 전반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그동안 진해지역에 대한 지역사 자료 조사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다소 더디게 진행된 감이 없지 않다. 2009년에 걸쳐 문경시 지역사 자료조사가 이루어졌다.